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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볼

2010/01/23 14:51 by 귀여운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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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독일인, 독일문화. 한국인, 한국문화. 전자의 두 단어와 후자의 두 단어는 분명히 구별된다. 문자적인(기표) 차이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기의) 자체가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그 의미 역시 1차적인 직접적 의미보다는 1차적인 의미에 함축되어 있는 2차적인 의미에 의해서 그 차이점은 더욱 극명해진다. 그렇다면 이 차이점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독일인들은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시간관념이 철저하다고 한다. 그리고 독일문화 역시 내면적, 이지적이며 관념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어떤 절대적 기준이 아닌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서 나타나는 요소이다. 즉 이러한 독일인, 독일 문화와 비교할 어떤 대상이 있어야만 나타는 점들이다. 이런 비교 대상으로 한국인, 한국문화와 선택 했을 경우 이런 독일인, 독일문화의 특성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이 말은 독일과 한국은 서로 많은 차이점, 아니 대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보통 독일인들이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시간관념이 철저한 것에 비해 한국인들은 온정적이고 감정적이며 시간관념이 느슨한 편이다. 또한 독일문화가 차갑고 이지적이며 관념적인데 비해 한국문화는 수사적, 감성적이며 경험을 중시한다. 물론 이러한 두 문화간의 차이는 흔히 우리가 상식으로 부르는 일반적인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점에서 독일 문화와 한국문화가 차이점을 가지는지, 그리고 그를 통해 드러나는 독일 문화의 특징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한 두 문화간에 차이점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추론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구체적 사건, 또는 소재를 가지고 독일 문화와 한국 문화를 비교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가 생긴다.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현대 문화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를 소재로 삼기로 한다. 한 편의 영화 속에는 그 나라의 음악(배경음악), 문학(스토리), 미술(영상), 그리고 내면의식(주제)이 총괄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영화를 통해 그 나라의 문화를 파악하는 일은 상당히 효율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몇 편의 독일 영화를 분석하고 각 영화마다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상징과 주제를 통해 독일문화와 한국 문화가 어떤 점에서 유사점, 혹은 차이점을 가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유로파유로파’에서는 종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강력한 두 이데올로기의 충돌과 이를 극복해 나가는 독일인의 선택을 통해 독일인의 자기내면 탐구의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둘째로 ‘신과 함께 가라’에서는 종교라는 절대적인 권위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선택과 내면 그 자체를 더 우위에 두는 독일인들의 인간존중의 모습을 알아본다.

 셋째로 ‘익스페리먼트’에서는 질서를 위한 규범과 그 규범에 대한 존중이 오히려 파괴를 불러오는 상황을 통해 규범과 질서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나머지 나치즘이라는 모순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독일인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넷째로 ‘비욘드 사일런스’와 ‘피아니스트’를 통해서 직접적이지만 피동적인 말보다는 간접적이지만 능동적인 문자를 통한 소통이 더욱 진실을 전달하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관념적인 독일문화를 찾아보기로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글루미 선데이’에 나타나는 자신과 타인의 관계, 타인과 타인의 관계에 선행하는 인간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는 독일인의 의식을 통해 독일 문화와 한국 문화가 가장 크게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본  론


1. 유로파유로파

- 종교의 충돌에 놓인 인간의 선택

 영화 유로파유로파는 외형적으로는 독일의 나치즘(국가사회주의, 인종주의)과 소련의 볼셰비즘(공산주의) 사이에 내던져진 솔리라는 유대인 소년의 선택과 그를 통해 나타나는 두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이데올로기 자체의 모순보다는 이 사이에 놓인 솔리라는 인물이 각 이데올로기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며 그 반응에 대한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가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영화에서 나타나는 나치즘과 볼셰비즘이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이념이라는 차원을 넘어 하나의 종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솔리가 목욕을 할 때 폭동을 일으키던 독일인들은 하나의 종교에 극단적으로 심취한 광신도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도덕이나 이성은 (심지어 법률마저) 나치즘, 특히 인종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솔리의 누나를 살해하고서도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영화에서 솔리의 누나가 식탁위에 누운 체 죽어 있는 모습은 그녀가 단순히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간살(奸殺) 당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도 보인다. 이는 분명 추악한 범죄임이 틀림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악한 행동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나치즘이라는 그들의 종교에 따르면 반드시 척결해야할 이단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향한 그들의 증오와 실제적인 적대행위는 그들의 종교에 있어서는 영웅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라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도덕 관념 마저도 비틀고 왜곡 시켜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모습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이 일으켰던 십자군 전쟁과 유사한 면이 많다. 당시 아랍인들에게 십자군은 단순히 흉포한 침략군에 지나지 않았지만 십자군 스스로는 신을 대신해 전쟁을 치르는 성스러운 전쟁의 참여자임을 믿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이런 의식의 바탕에는 크리스트교가 깔려 있었다. 크리스트교라는 그들의 종교가 십자군의 전쟁행위에 면죄부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시 독일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공격을 성스러운 행위로 여겼다. 자료에 따르면 2차대전에 참가했던 독일인들은 그들이 싸우는 목적이 유럽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유럽에서 몰아내 유럽대륙을 깨끗이 정화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즉 이들에게 있어서 나치즘은 종교이고 2차대전은 일종의 종교 전쟁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전체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이 나치즘이라는 종교의 교주는 바로 히틀러이다. 독일군 내에서의 구호가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든지 곳곳에 걸린 히틀러의 초상화 들은 이런 점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영화에서 이런 독일인들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나타내 주는 인물이 솔리가 독일인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레니라는 소녀이다. 레니의 유대인들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 그리고 순수한 독일 혈통을 얻기 위해 솔리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이를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 등은 나치즘이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종교 그 자체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독일인들이 상당히 종교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종교는 그 자신보다는 중요하지 않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 선택 가능한 하나의 이념에 불과하다. 이점은 ‘신과 함께 가라’를 통해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나치즘에 대비되는 또 하나의 종교가 바로 소련의 볼셰비즘(공산주의)이다. 영화에서 나타나는 공산주의 역시 단순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종교에 가까운 모습이다.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고드노의 고아원에서 일어났던 아이들에게 사탕을 뿌려주는 장면이다. 고드노에서는 아이들에게 종교는 마약이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에 대해 폴란드 출신의 한 아이는 신은 존재한다며 맞서게 된다. 고드노의 여성지도자는 그 소년에게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보이라고 하고 소년의 간절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스탈린을 외치자 곧 지붕에서 사탕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 모습은 마치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선지자와 바알의 제사장들간에 벌어졌던 기적 싸움을 보는 듯하다. 결국 기적이 사실인지 여부를 떠나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여주는 쪽이 승리하고 있다.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가 바로 종교의 힘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강력하고 거친 힘을 가진 이 두 개의 종교 사이에 유대인인 동시에 독일인이기도 한 솔리가 내던져져 있다. 유대인인 솔리는 태어나면서 할례를 받는다. 할례를 통해 솔리는 평생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일종의 종교적 낙인이 찍히게 된다. 하지만 솔리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할례를 받기는 했지만 독일에서 솔리 일가가 독일인 폭도의 습격을 받을 때 가족과 분리된 공간인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하는 솔리와 누나인 베르타(즉 유대인)가 죽음을 당하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은 솔리는 할례와 무관하게 이미 유대인이 아닌,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백지상태가 됨을 보여준다.

 즉 솔리는 아직 스스로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은 상태로 시작하게 된다. 그런 솔리가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이데올로기-종교-가 바로 공산주의이다. 폴란드에서 탈출하는 와중에 어쩔 수 없이 고드노의 고아원에 들어오게 된 솔리는 그곳에서 공산주의라는 종교를 선택하게 된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솔리가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강압적인 환경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고도 볼 수 있지만 영화에서 나타나는 솔리는 분명히 능동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옹호한다. (영화의 전개는 모두 솔리의 선택과 그 결과에 따라 이루어 지고 있다. 즉 솔리의 선택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중요 동인이다)

 즉 백지상태의 솔리에게 하나의 신앙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 신앙 안에서 같은 신도인 고드노의 여성지도자를 만나게 되고 간접적인 교감을 나누게 된다. 그녀가 특히 솔리에게 호의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로 둘 다 공산주의에 대해 적극적인 신앙인이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드노의 고아원에 걸려 있는 스탈린은 이 공산주의의 교주가 바로 스탈린이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고드노 고아원 자체가 하나의 공산주의 수도원, 또는 신학교인 셈이다. 그리고 솔리는 우수한 신학생이 되어 간다.

 이때 이미 하나의 선택을 한 솔리에게 있어서 또 다른 선택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는 사람이 바로 폴란드인 소년이다. 폴란드 소년은 유대인임을 잊어버리고 또한 종교마저 부정하는 솔리를 경멸하며 솔리에게 대항한다. 그의 존재는 솔리에게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영화전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솔리에게 또 다른 선택의 기회를 주고 있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때 솔리의 선택은 흔들리지 않고 지붕 위의 사탕을 통해 표현되는 종교적 기적을 통해 솔리의 신앙은 더욱 확고해 지고 만다.

 하지만 솔리의 선택은 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두 번째로 솔리가 선택하게 되는 종교는  나치즘이다. 이 때의 선택은 총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죽느냐 사느냐 둘 중 하나의 선택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선택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이 역시 솔리의 능동적인 선택이다. 독일군들은 솔리에게 유대인인지 아닌지 증명하기를 강요했지만 어떤 선택의 기회를 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솔리는 해결책으로 독일인이 되어버리는 길을 스스로 선택 하게 된다.

 독일인-독일군인-이 되면서 솔리는 어느새 기존의 신앙을 버리고 나치즘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듯이 자신이 독일인임을 자랑스러워하기에 이른다. 이부분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솔리의 정체성 혼란이다. 이 정체성 혼란은 솔리의 꿈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점을 두고 보아야 할 것은 유대인이자 동시에 독일인인 솔리라는 소년의 정체성 혼란 이전에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망설이지 않는 독일인의 의식이다.

 처음 솔리가 공산주의라는 종교를 선택하기 전에는 솔리 자체가 백지 상태였기 때문에 망설임이 있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두 번째 선택 이후에 솔리의 모습을 보면 선택 이후의 주저함이라거나 최소한의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약 종교를 개인의 삶보다 상위에 두는 한국인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처음 선택의 종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를 택한다는 그 자체가 내면적으로 심각한 죄책감과 갈등을 불러 올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독일인인 솔리(솔리가 비록 육체적으로 할례를 했지만 그의 언어와 사고방식, 자란 환경은 분명 독일인과 같다)는 종교라는 거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있어서 능동적이며 또한 망설임이 없다. 그 이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영화는 솔리의 선택, 즉 독일인의 선택을 다루고 있다. 처음에 솔리가 몸담게 된 종교인 공산주의를 솔리는 긍정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두 번째 종교인 나치즘을 받아들이면서 솔리는 첫 번째 종교에 대해 전혀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독일인들은 자기 스스로의 내면에 따른 선택이 이데올로기, 심지어 종교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 같은 경우 개인의 내면은 결코 종교(혈연, 지연, 그리고 사상과 이념 등을 모두 총괄하는 상위 개념으로서) 보다 우위일 수가 없을 것이다. 종교와 개인의 내면이 서로 갈등할 때 대부분은 종교가 이기게 되며 개인은 오히려 종교의 승리가 그 자신의 발전을 불러오는 긍정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이 강조하는 의리라는 것을 살펴보자. 만약 범죄를 저지른 친구가 자신을 찾아와 숨겨주기를 바랄 때와 같이 친구 간의 의리와 그 자신의 양심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될 경우 의리를 따라 친구를 숨겨주는 행위에 대해서 법적인 문제를 떠나 사회의 도덕적 감정은 그다지 비난을 하지 않는다. 개인의 양심과 내면보다 의리라는 사회적 통념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솔리로 대표되는 독일인들은 분명 다르다. 외부의 강한 권위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솔리의 선택은 실질적으로는 모두 능동적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라) 또한 그 선택이 단 한번 정해짐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또 다른 선택을 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독일인 학교 이후 독일군 병사로 전투에 참가한 솔리는 점차 자신의 선택이 잘못 되었음을 인지하고 다시 소련군에 투항하고 만다.

물론 이런 계속되는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솔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여러번 겪게 되고 이는 솔리의 꿈을 통해 암시되고 있다. 이런 정체성의 혼란은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인 게토에서 유대인의 참혹한 실상을 보고 난 후 더욱 심화 된다. 하지만 이 혼란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씻어주는 존재인 성모 마리아로 나타나는 레니의 어머니를 통해 해소된다. 솔리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깨닫게 되고 더 이상의 혼란은 없다.

 또한 이런 정체성의 혼란 문제가 실제로 솔리의 선택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은 솔리의 선택에 따른 하나의 결과로 나타났을 뿐이다. 즉 솔리에게 있어서 선택은 정체성 그 이전의 문제이다.

 ‘ 유로파유로파’는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솔리라는 유대인 소년의 수난, 나치즘과 공산주의라는 두 이데올로기의 모순, 전쟁 그 자체의 참혹함 등등 여러 개의 주제를 동시에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좀 더 들여다보았을 때 ‘유로파유로파’는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주제 역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 그 자신의 내면의식에 따른 선택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 되고 또한 그것이 존중받을 수 있는 독일인들의 특징이 영화전체에 나타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우리 한국인들의 의식과 비교해 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2. 신과 함께 가라

- 신은 소리속에 계시다

 ‘Vaya Con Dios’ (신과 함께 가라). 이 영화는 과연 종교적인 영화인가. 수도원이 주요 배경이고 또한 주요 등장인물 역시 키아라를 제외하면 모두 수도사들이다. 제목 역시 ‘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며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요 요소인 찬송가 역시 신에 대한 찬양의 노래이다.  그렇다면 ‘신과 함께 가라’는 종교-카톨릭-영화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제목과 배경과는 전혀 달리 이 영화는 어디에서도 신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 아니 처음부터 이 영화에서 신은 등장하지조차 않는다. 물론 신이라는 의미로서의 ‘신’ 그 자체는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는 신은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처음 이 영화를 보게 되면서 한 가지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분명히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바로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주제를 말해주고 있는데 바로 키아라와 아르보의 성관계 부분이다. 이 부분과 그 외의 장면에서 드러나는 독일인들의 종교에 대한 중요한 의식 하나를 찾아보기로 한다. 먼저 전제해 둘 것은 결코 키아라와 아르보간의 성관계 그 자체나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살펴보야 할 것은 이 관계를 둘러싼 키아라, 아르보 자신들과 주변인들의 반응, 그리고 그 반응에 대한 원인과 독일인들의 종교에 대한 관념의 문제이다.

영화에서는 타실로, 벤노, 아르보 셋 모두 한 번씩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셋의 갈등 모두가 속세에 대한 미련과 수도사로서의 신앙 사이의 갈등이라고 보기 쉽다. 타실로는 가족(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신앙, 벤노는 음악과 명예에 대한 욕망과 신앙, 아르보는 키아라에 대한 사랑과 신앙. 이렇게 셋 모두 속세의 어떤 가치와 믿음간의 갈등을 가진다고 보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신과 함께 가라’에는 신앙이 없고 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칸토리안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그들이 하는 예배의식은 바로 소리를 통한 찬송가이다. 그들은 소리속에, 음악속에 신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소리 속에 신이 있는가? 그들의 노랫소리에는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네 명의 수도사가 내는 소리는 서로 간에 정확한 화음과 음정을 맞추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노래를 하면서 스스로를 확인하고 발견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소리를 내고 만들어가는 주체는 수도사 그들 자신이다. 화음을 맞추는 것도 그들 자신이며 그 화음을 통해 감동을 받는 것도 그들 자신이다. (수도원에는 그들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들의 노래는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듣기 위한 것이다. 물론 신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지만 수도사들은 노래 그 자체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즉 노래속에 신이 존재 하니 않을 때 신은 결국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는 것이다) 즉 소리 속에 성령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속에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

영화의 주요 시퀀스인 등장인물들의 선택 부분에서 이런 점은 더욱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먼저 타실로의 갈등 부분을 살펴보자. 교단의 규범집을 이탈리아에 있는 칸토리안 수도원에 전해달라는 수도원장의 유언에 따라 타실로, 벤노, 아르보는 길을 떠난다. 가는 도중에 그들은 키아라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타실로 어머니의 집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어머니를 만난 타실로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걱정으로 다른 수도사들과 함께 길을 떠나기를 거부하게 된다. 여기서 벤노수사는 타실로를 설득하다 싸움에 이르게 되는데 뭔가 어색한 장면을 발견 할 수 있다. 벤노가 타실로를 설득하는 말 중에서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도사인 그들로서는 당연히 그들 자신의 믿음에 관한 말이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벤노는 타실로에게 신을 위해서 길을 가야 한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벤노의 설득은  수도원장의 유언이라는 인간적인 이유에 머물고 있다. 타실로 역시 몇 십년간 믿어온 믿음을 버린다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없다 그가 갈등하는 이유 역시 수도원장의 유언에 대한 의무감과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한 애정뿐이다. 이후에 타실로가 스스로 다시 마음을 돌이키는 원인 역시 믿음이나 신과는 상관없는 수도원 생활에 대한 향수와 의무감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신은 등장할 여지가 없다.

  벤노의 갈등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고뇌에서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르보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한때의 벤노의 친구였던 신학교 교장의 경우는 좀더 경우가 심하다. 그의 경우 규범집을 빼앗기 위해서 신학교 교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하는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 오히려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정의인 것이다.

특히 이런 부분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키아라와 아르보간의 성관계 장면이다. 우리 한국인들로서는 남자 수도사가 여성과 성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금기사항이다. 교리적, 도덕적 그 이전에 수도사라는 존재 자체가 이런 욕망을 인내하고 초월해 나가는 존재를 뜻한다. 그러니 굳이 우리가 한국인뿐만 아니라 독일인들 그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행위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아르보를 유혹하는 키아라(반드시 키아라의 유혹만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리고 그 유혹에 망설임 없이 응하는 아르보,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는 타실로 모두 어떠한 어색함이나 갈등을 가지지 않는다. 수도사이면서 성적인 욕구를 채우는 아르보는 전혀 죄책감이나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타실로 역시 이런 아르보의 행위를 오히려 긍정하고 있다. 이런 성적인 관계 자체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은 스스로 속세의 욕구를 멀리하는 수도사이면서 그런 수도사로서의 모습은 전혀 보여주고 있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영화속의 이런 장면이 가능한가. 단순히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다. 서론에서 말 했듯이 영화는 그 나라의 문화와 의식을 총괄적으로 담고 있는 문화의 소산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에서 가진 그 의문을 바로 그 영화 자체가 담고 있는 그 나라의 문화의식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독일인들의 신에 대한 인식에서 찾아야 한다.

가치라는 것에는 순위를 매기는 것이 힘들다. 아니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A가 B보다 더 중요하다는 정도는 판단할 수 있다. 영화 ‘신과 함께 가라’에서 나타나는 가치 중 하나인 종교(비록 표면적으로 영화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와 그리고 실제적으로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치, 즉 독일인들의 내면의식에 대한 존중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영화 유로파유로파에 대해 서술 할 때도 언급된 것처럼 한국인들의 경우 자기 자신의 내면보다는 외부의 가치를 더 우위에 두는 경향이 크다. 종교, 의리, 집단에 대한 의무 등은 대부분 개인의 판단보다 더 중요하다. 하지만 영화 ‘신과 함께 가라’에서 나타나는 독일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인간내면의 선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존중해준다.

타실로가 어머니에 대한 애정으로 집에 남기를 원했을 때 벤노와 아르보는 설득을 하지만 결국 타실로의 결정을 존중한다. 아르보가 수도원을 버리고 키아라를 선택할 때에도 수도사들은 아르보의 결정을 존중하고 받아들인다. 인생전체를 신에게 바친 수도사들이지만 결코 신의 이름으로 그를 붙잡거나 억압하려 들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신앙을 이유로 아르보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더라도 아르보는 자신의 결정대로 행동 했을 것임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종교 그 자체보다 개인의 의지가 더욱 중요하고 또 우위에 있는 것이다.

즉 신보다 인간이 더 우위, 최소한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나타나는 독일인들은 종교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는 하지만 그 가치가 결코 개인의 의지 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는 인간의 높은 가치와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런 점을 이해했을 때에야 비로소 키아라와 아르보의 성관계 장면이 전혀 추하거나 어색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키아라와 아르보 두 사람에게 있어서 그 순간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물론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스스로가 선택하고 인정한 그들의 내면이다. 따라서 그들의 내면을 표현하고 확인 하는 것은 수도사라는 길을 걷고 있는 아르보의 신앙보다, 세속의 욕망을 피하려는 수도사를 유혹하는 키아라의 죄책감(영화에서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보다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그리고 타실로가 이들의 관계를 보면서 아르보에 대해 어떠한 책망도 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하는 모습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 할 수 있다. 타실로 자신의 의지와 선택이 중요한 만큼 타인인 아르보의 의지와 선택도 중요함을 타실로는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이다.

처음의 칸토리안 수도원에서 네 명의 수도사가 노래하는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수도원장, 벤노, 타실로, 아르보가 하는 노래는 바로 신에 대한 예배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노래 속에 신은 없다. 각자가 맡은 화음 하나하나를 존중하고 또한 자신의 화음이 존중 받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화가 바로 그들 노래이다. 즉 노래를 통해 그들은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면서 또한 타인의 내면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노래 속에 있는 것은 바로 노래와 함께 자아를 발견하는 그들 자신이다. 그들은 결코 신의 명령대로만 뒤에서 끌려가고 있지 않다. 그들의 내면과 의지는 신, 즉 종교와 동등한 위치로 인정받고 있다. 신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신의 옆에서 그들은 바로 신과 “함께” 가고 있다.






3. 익스페리먼트

- 질서가 가져오는 파괴의 아이러니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질서 의식이 상당히 부족하다고 한다. 이것은 도로에서 나타나는 차량들의 운행을 보면 쉽게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비단 교통질서뿐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질서와 규칙에 대한 존중의식이 미약한 편이다. 분명 집단의 규칙을 개인의 이익보다 더 중시하는 농경문화의 특성을 농경민족인 한국인들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독일인들은 질서와 규칙에 대해 엄격하다. 각 개인마다 질서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규범속의 국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본래 유목민족은 어떤 규칙이나 질서보다는 힘과 정의를 통한 지배의 문화를 가지고 있고 독일문화는 전통적으로 유목민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규칙과 질서를 중요시 한다. 한국과 독일은 이렇게 무언가 뒤바뀌어 있는 것만 같다.

영화 ‘익스페리먼트’에서는 이러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의 준수가 극단적으로 추구되었을 때 오히려 질서 그 자체가 붕괴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익스페리먼트’는 제목 그대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소재로 하고 있다. 톤 박사는 이 실험을 통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의지, 갇힌 자와 관리하는 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정립되고 변화 되어 가는가 하는 점 등을 관찰하고자 한다. 물론 이 영화를 보는 사람 역시 톤 박사의 시점, 즉 관찰하고 연구하는 시점으로 ‘익스페리먼트’를 바라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2차적으로 이런 인간의 의지와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행동을 통해 질서와 규칙이라는 독일인들의 의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관찰자의 위치에 있는 실험 연구팀을 제외 한다면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대립 구조는 극히 단순하다. 8명의 간수 팀과 12명의 죄수팀간의 갈등을 영화는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리는 처음부터 생긴 것은 아니다. 실험 시작 전에는 20명 모두 동등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들 각자의 사회적 위치는 모두 다르지만 실험에 자원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모두 어느 누가 주인이거나 노예가 아닌 평등한 관계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인터뷰를 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앞으로 누가 간수가 되고 누가 죄수가 될지 예측할 수 없다. 즉 일종의 작은 원시 사회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등한 상황은 간수 팀과 죄수 팀으로 나누어지고 각각의 제복을 입는 순간부터 완전하게 깨어지게 된다. 즉 이 두 그룹은 서로가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세계는 실험실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 공존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조직이 만들어지고 이런 조직과 조직이 모여 하나의 사회를 이룰 때 이 사회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 바로 질서이다. 간수 팀 역시 이 작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죄수들에게 질서를 강요한다. 하지만 간수 팀이 강요하는 질서는 간수 팀들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이지 죄수 팀의 세계를 이해하고 유지하기 위한 질서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충돌 할 수밖에 없다. 비록 타렉이란 인물이 죄수들을 선동해서 그들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세계가 하나의 사회 안에 존재 하는 한 그들의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 간수와 죄수라는 두 조직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의식적으로는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려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분리상황의 지속은 결국 파멸을 가져오기 때문에 두 세계가 만나기 위한 어떤 매개체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질서, 즉 규칙이다.

하지만 이야기 했듯이 ‘익스페리먼트’에서 간수들이 원하는 질서는 그들을 위한 것이지 죄수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갈등이 생기고 이런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 간수들은 그들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런 권력은 그 자체의 힘으로 잠시 동안의 질서를 가져올 수 있지만 결코 오래 지속될 수는 없고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간수들은 왜 죄수들에게 그토록 강력하게 질서를 지킬 것을 요구 하는 것일까. 처음에 그들이 죄수들에게 요구했던 질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억압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첫째로 규율 그 자체를 중시하는 독일인들의 특성과 둘째로  타렉을 중심으로 한 죄수들의 저항이 거세져 그에 대한 반응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자신들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어떤 조직 내에 혼란과 대립이 발생 했을 때 이런 대립을 가장 효율적으로 해소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예는 역사적으로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2차대전 직전의 히틀러이다..

2차대전 이전의 독일은 경제대공황으로 인해 정치, 경제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들었고 사상적으로는 좌파와 우파의 대립으로 사회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려들던 때였다. 이 때 나타난 것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다. 히틀러는 유대인이라는 외부의 적(독일인과 유대인은 공간적으로는 독일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공존했지만 의식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을 설정함으로써 독일인들 서로간의 적개심과 대립을 외부로 돌리면서 독일 내부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무마시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반유대주의는 내부의 질서회복이라는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체 반유대주의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다.

‘익스페리먼트’에서도 마찬가지로 간수팀은 그들 간에 발생하려고 했던 작은 알력들이 죄수팀이 적이 되는 순간(슈테의 우유사건과 타렉의 반항) 모두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죄수팀에 대한 이들의 적개심은 점차 커져서 실험실 내부의 질서 유지라는 원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죄수들에 대한 억압의 성공이 곧 간수 팀의 목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것이 곧 올바른 질서라고 믿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왜 독일인들이 쉽게 히틀러의 나치즘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 할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듯이 2차대전 직전에는 경제대공황으로 인해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혼란에 빠져들던 때였다. 따라서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도 2차대전의 도화선이 될 잠재성은 내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왜 바로 독일인이 그 도화선에 불을 붙였을까. 수많은 요인들이 있을 수 있지만 영화 ‘익스페리먼트’는 바로 그 요인 중의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로 독일인들의 극단적인 질서추구가 그것이다.

경제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각 나라마다 다양했다. 미국의 경우 뉴딜정책, 영국 등의 서유럽은 식민지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착취를 통해 경제대공황의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이 택한 방식은 이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대공황이 가져온 혼란은 독일의 질서를 무너뜨렸고 이 때 나타난 히틀러는 그들에게 질서를 준 것이다. 바로 반유대주의라는 외부의 적을 통해 히틀러는 독일인들에게 질서를 주었고 독일인들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이 곧 2차대전의 진원지가 독일이 된 요인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익스페리먼트’에서 간수 팀들이 그토록 유지하고자 했던 질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실험의 파멸을 불러 온 것처럼 독일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독일인들의 열망이 곧 독일 그 자체의 파멸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4. 비욘드 사일런스, 피아니스트

- 진실을 전하는 것은 소리인가 문자인가


한 인간의 성격 형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성격, 인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가정환경이라고 생각해 왔다. 물론 나치즘과 같이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극단적 인종주의 이론을 제외한다면 가정이 인간의 형성에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는 실제 가정환경이 성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10%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보다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학교나 친구와 같은 사회적 환경이 50%이상의 영향을 준다는 결론이 나기에 이르렀다.

실제 한 인간이 성장하는 시기에 가정과 사회, 어느 쪽에서 더 시간을 보내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만약 그 개인이 사회와 소통하는데 있어서 제약이 있다면, 또는 가정환경 자체의 제재로 사회와의 접촉하는 기회가 매우 적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럴 경우 가정환경이 그 개인의 성격과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영화 ‘비욘드 사일런스’와 ‘피아니스트’ 둘 모두 공통적으로 이러한 제약이 나타나고 있다. 바로 개인의 사회와의 의사소통의 부재-또는 부족-이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경우 ‘비욘드 사일런스와 함께 의사소통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만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먼저 영화 ‘비욘드 사일런스’를 살펴보자.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의사소통의 제약은 바로 소리, 즉 음성이다. 마틴과 그의 아내는 청각장애인이다. 청각장애인의 경우 대부분은 말 역시 하지 못한다. 마틴의 경우에는 소리를 듣지는 못하지만 소리를 낼 수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에서 나타나듯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마틴은 말을 배우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수화에만 의존하게 된다.

이런 장애로 인해 마틴은 일반적인 세상과 단절 되어 버린다. 외부의 정보를 얻지 못하고(청각장애) 또한 자신의 의사를 표현 하지 못하기 때문에(언어장애) 이들은 외부 세계와는 다른 자신들만의 세계에 살 수 밖에 없다. (같은 공간 안에 존재 하지만 서로 다른 세계를 사는 이들의 모습은 앞에서 살펴본 영화 ‘익스페리먼트’의 간수와 죄수들의 의식적인 단절과 유사하다)

이들은 외부와 소통하는 수단으로 수화에만 의존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화라는 수단은 그들의 세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세계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딸인 라라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의사소통은 매개체인 라라에 의해서 얼마든지 왜곡되어 전달 될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라고 보기 어렵다. 마틴과 외부세계가 수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연결 되지 못하고 다시 한번 라라의 소리라는 매개체를 거치게 될 경우 수화는 실제적으로 그들의 세계와 외부의 세계를 이어주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마틴의 어린 시절을 보면 그는 유년기 때부터 외부와 단절 되어 있다. 특히 마틴의 아버지로부터 이런 단절은 더욱 심화되고 그런 단절은 마틴의 누이에 대한 적개심으로 전이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마틴과 아버지의 관계가 아니라 마틴과 누이인 클라리사간의 관계이다.

클라리사의 클라리넷 연주회에서 마틴은 아버지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에 대한 반항으로 연주회를 엉망으로 만든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그것이 전혀 엉뚱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클라리사 역시 어머니가 자신보다 마틴에게만 애정을 쏟는 것에서 상처를 받지만 이 상처로 인한 증오심을 어머니가 아닌 마틴에게 돌리고 있다. 마틴과 아버지의 의사소통의 단절, 클라리사와 어머니의 의사소통의 단절은 결과적으로 마틴과 클라리사간의 관계까지 가로 막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남매로서 마틴과 같이 자란 클라리사가 마틴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화를 배우지 않고, 마틴 역시 소리를 낼 수 있음에도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것으로 설명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의 의사소통의 단절이 가져온 왜곡된 증오심이 또 다른 소통의 단절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경우 이런 의사소통의 단절은 조금 더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에리카는 영화 내내 다른 인물과 대화를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단 하나도 그녀 자신의 내면을 담고 있지 않다. 안나에게 피아노를 레슨을 하면서 그녀가 내뱉는 말은 실제 안나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소리로서 그치고 있다. 에리카의 시선-내면-은 창밖, 즉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에리카가 그녀의 어머니와 하는 대화 역시 어느 것 하나 그녀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없다. 어머니가 밉다고 하면서 또 어느새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들은 그녀의 자아 혼란을 나타낸다고 하기보다는 그것이 그녀의 내면에서 나온 말이 아닌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하기에 일관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욘드 사일런스’의 마틴과는 달리 그녀는 말을 들을 수 있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한 의사소통에 실패하고 있다. 수단이 있음에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소리-음성-이 아닌 다른 수단을 통해 외부세계와의 소통에 어느 정도 성공 하고 있다. 마틴은 불완전 하지만 수화-행동-를 통해서, 에리카는 편지-문자-를 통해서 외부세계에 자신의 내면을 전달하려고 한다. 이 두 수단의 공통점은 바로 시각을 이용한 표현 수단이라는 점이다. 마틴의 세계는 비록 외부와 단절되어 있지만 수화를 아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즉시 왜곡 없이 소통이 가능해진다. 에리카도 마찬가지로 언제나 스스로 의미 없이 왜곡 시키던 언어가 아닌 편지라는 매개를 통해서 외부세계(발터로 대표되는)에 자신의 진실을 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음성이라는 소리기호와 편지와 수화라는 문자 기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마틴과 에리카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제하고 일반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보통 말 보다는 글이 개인의 생각을 더 잘, 그리고 깊이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온라인 채팅을 들 수 있다. 평소에 말로는 하지 못했던 마음을 채팅을 통해서는 표현하기 어렵지 않다. ‘비욘드 사일런스’에서 라라가 연주실기시험을 볼 때 마틴이 시험장에 찾아오고 그 둘은 서로 멀리 떨어진 채로 수화를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연주시험장에 있는 시험관들은 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그들의 수화를 지켜보면서도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다.  이런 모습은 온라인 채팅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음성이 아닌 문자로 대화를 할 때 사람들은 더욱 서로의 진실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이런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 역시 음성을 통한 소통보다 진실에 조금 더 근접해 있을 뿐이지 진실 그 자체를 전달해 주지는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비욘드 사일런스’에서 라라는 마틴과 수화를 주고받을 때 마틴이 전달하는 내용과 자신이 전달하는 내용을 수화와 음성으로 동시에 표현한다. 즉 마틴에게 수화로 의사를 전달하면서 마틴이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내용을 입으로 말하고 또 마틴이 수화로 표현하는 내용도 또한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있다(물론 이것이 단순히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대화 내용을 알려주기 위한 영화적 장치일 뿐이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수화라는 수단이 본질적으로 마틴과 라라 둘의 의사소통을 왜곡 없이 연결해주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라라는 수화를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 내용을 받아들일 때는 다시 한 번 말-음성-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즉 라라는 마틴과 수화 그자체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써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마틴의 세계와 라라의 세계는 결코 맞닿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비욘드 사일런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마틴은 라라의 음악을 이해해보겠다고 하지만 결국 그는 라라의 음악 그 자체는 이해 할 수 없다. 마틴이 이해하는 것은 라라의 음악이 아니라 자신의 딸인 라라를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서 이해하겠다는 뜻이다.

‘피아니스트’에서 에리카의 편지는 그녀의 진심을 담고 있지만 발터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발터가 이해하는 것은 편지속의 문자가 담고 있는 피상적인 의미, 즉 일탈적인 성행위를 요구하는 그녀의 왜곡된 욕망뿐이다. 발터는 그녀가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와 소통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발터는 말로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에리카에게 계속 대화를 요구하며 에리카의 표현수단인 편지는 계속해서 외면하며 결국 편지를 읽기는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하지만 결국 이런 의사소통이 비록 왜곡되기는 했지만 말보다는 조금 더 서로간의 진실에 가까운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는 장면도 찾을 수 있다. ‘비욘드 사일런스’에서 클라리사가 수화로 마틴과 대화하는(이 장면 역시 온라인 채팅과 동일하다) 모습이라든가, 화장실에서 에리카의 말을 계속 거절하던 발터가 그녀의 편지를 읽으면서 피상적이나마 그녀의 본질에 대해 느끼고 동정심을 가지는 모습 등에서 비록 진실 그 자체는 아니지만 말보다는 문자가 개인과 개인간의 소통에 있어서 조금 더 진실에 근접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독일 문화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 보통 말이 직접적이고 수사적이라면 글은 간접적이고 은유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간접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은 바로 독일문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독일의 여러 영화라던가 독일의 문학, 특히 시와 같은 경우 수사적인 표현을 중요시 하고 있는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은유적인 함축과 내재를 만들어 가려고 노력한다. 이런 은유와 함축으로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려 독일의 문화적 특징은 독일인들의 의식에 깊은 관념적 속성을 만들어 주었고 이것이 독일 철학을 낳은 원동력 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한국 문화의 경우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기보다는 사물 그 자체를 표현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한국 문화가 수사적이고 환유적인 특징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독일의 문화를 은유를 통해서 진실을 탐구하는 문화, 한국의 문화를 수사를 통해서 진실을 표현하는 문화라고 결론 내린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 진실에 더욱 접근해 있는가의 여부는 여전히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다.



5. 글루미 선데이

- 존재. 그 자체의 인정

‘글루미 선데이’는 독일인 그 자체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 전체를 관통해서 흐르는 우울한 음악은 둘째 치고라도 일로나와 차보, 안드라쉬의 조화를 이룬 삼각관계는 한국, 아니 다른 어떤 나라를 가더라도 용납받기 쉽지 않을 특이한 모습이다. ‘글루미 선데이’의 일로나와 두 남자의 관계는 영화 속에서 전혀 어색하거나 어두운 구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영화의 시작에서 일로나와 관계를 가지고 있던 유일한 인물인 차보는 처음부터 일로나를 소유하려고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안드라쉬의 등장으로 일로나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결코 일로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다. 안드라쉬 역시 일로나를 차보에게서 빼앗아 자신만이 독차지 하겠다는 욕망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관계는 한국이라면 절대로 인정 될 수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글루미 선데이’의 사람들은 이런 관계를 인정한다. 아니 실제로는 인정한다거나 인정할 수 없다거나 할 이유 자체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바로 독일적인 의식의 바탕 위에 그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차보는 안드라쉬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 있다. 본래부터 일로나의 연인이었으며 갈 곳 없던 가난한 음악가인 안드라쉬의 고용주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보는 일로나와 안드라쉬 사이에 시작된 애정을 자신의 위치-일종의 권력-을 이용해 가로막지 않는다. 일로나와 안드라쉬가 하룻밤을 보내고 다정하게 거리를 걷는 모습을 보고 질투에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이유로 안드라쉬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안드라쉬는 여전히 차보의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차보는 오히려 안드라쉬의 음악적 성공을 위해(물론 그 성공이 차보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

물론 실제로는 안드라쉬를 미워하면서 겉으로는 이것을 감추고 있는 이중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차보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질투의 감정을 안드라쉬에 대한 증오로 전이시키는 것을 잘 억제하고 있다.

안드라쉬의 경우 역시 차보에게서 사랑하는 일로나를 빼앗아 자신만이 가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안드라쉬는 일로나가 어디까지나 차보의 연인이었으며 일로나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차보 또한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역시 차보에 대한 질투로 괴로워 하지만 그것이 차보에 대한 증오로 옮겨 가지는 않는다. 실제로 영화 내에서 안드라쉬가 고민을 하고 우울증으로 빠져들게 되는 원인은 안드라쉬 자신의 음악적 고민에 대한 문제이지 일로나, 차보, 안드라쉬 셋 간의 복잡한 애정 관계 때문은 아니다.

두 남자와 사랑을 하는 일로나 (실제 영화 내에서 일로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차보와 안드라쉬 뿐만이 아니다. 한스, 그림 그리는 노인 등 다양하지만 일로나와 상호적인 관계를 주고 받는 사람은 차보와 안드라쉬 뿐이다) 역시 이런 애정으로 인한 고민이나 괴로움은 오래 가지 않는다. 일로나는 그 둘에게 자신과 관계를 유지할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 안드라쉬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차보를 버린다거나 차보와 이미 연인사이였기 때문에 안드라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든가 하지 않는다. 차보는 차보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이유로 사랑을 하고 안드라쉬 역시 안드라쉬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이유로 사랑을 한다.

이것은 바로 사람 그 자체를 인정하는 독일적인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차보는 일로나를 어떤 소유의 대상물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인정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일로나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안드라쉬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일로나를 사랑하고 또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차보는 인정하고 있다. 안드라쉬 또한 사랑에 있어서 자신이 차보와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있다. 비록 사회적으로는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관계이지만 그것이 일로나와 안드라쉬의 관계라는 사적인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이들 셋은 서로간의 애정과 관계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것이다. 관계 그 이전에 그들은 서로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또한 각자의 내면적인 선택을 존중해 주고 있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에서 이런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라는 독일적 의식을 거부하는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인 한스 뿐이다. 한스는 일로나, 차보, 안드라쉬와 같은 관계 속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 세 명 전체와 한스는 1:1로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스는 일로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단 한 번도 일로나를 자신과 동등한 선택의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일로나는 소유하고 싶은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일로나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하자 자살을 시도했던 한스는 일로나에 대한 사랑의 괴로움으로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기자신에 대한 무능력함으로 인한 상처가 그 원인이었다. 한스가 사랑하는 것은 일로나가 아닌 일로나를 소유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즉 한스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한스는 결코 차보와 안드라쉬가 일로나와 맺은 것과 같은 상호존중의 관계속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이 점을 보면 한스는 독일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는 이미 독일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한스의 모습은 독일인들이 증오하던 왜곡된 유대인의 이미지 그대로이다)

글루미 선데이에 등장하는 일로나, 차보, 안드라쉬의 삼각형 사랑은 단지 그들 서로간의 애정이 질투보다 더 크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질투라는 감정은 사랑이 크면 클수록 함께 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가 유지되는 바탕은 상호인정이라는 지극히 독일적인 바탕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존중과 인정이 독일만의 특성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서양세계 대부분이 합리성과 인간 개인주의적 특성이 일반적인 특성이 아닌가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특성이 굳이 독일만의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존중과 인정이 애정이라는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지속된다는 데에 있다.

미국의 시트콤 프렌즈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를 보면 한 명의 여자가 다른 많은 남자를 똑같이 사랑하고 관계를 가지고 장면이 나온다. 그 여자는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남자를 사랑하며 이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와 관계를 가지는 남자들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런 여자를 이해하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만이 그녀를 독점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며 마침내는 그녀를 놓아버린다. 차보가 일로나를 모두 잃느니 보다 반만이라도 가지는 것을 선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은 사랑하는 여자를 전부 가지지 못 할 바에는 완전히 포기해버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정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선택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일로나, 차보 안드라쉬의 모습에서 인간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독일인들만의 가장 독특한 문화와 의식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결 론

앞에서 살펴본 여섯 편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뽑아 낼 수 있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유로파유로파’에서 나타난 인간의 내면적 선택에 대한 존중, ‘신과 함께 가라’에서 드러나는 그 무엇보다 개인의 의지를 상위에 두는 의식, ‘익스페리먼트’에서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지만 반드시 부정적이라고 볼 수 없는 질서와 규칙에 대한 엄격함, ‘비욘드 사일런스’와 ‘피아니스트’에서 볼 수 있는 관념적인 독일 문화, 그리고 ‘글루미 선데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개인의 내면에 대한 인정과 존중.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독일인, 독일 문화의 가장 확연한 특성 하나를 말해 본다면 그것은 ‘인간 그 자체의 인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과 함께 가라’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독일인들은 심지어 신보다도 현실에 공존하고 있는 인간 각 개인을 더 우위에 두고 있을 정도로 독일문화에서 서로 간에 대한 존중의식은 철저하다. 종교개혁의 횃불이 처음 독일에서 루터에 의해 밝혀진 것도 이런 의식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세 시대 유럽 전체에서 그 무엇도 도전할 수 없는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카톨릭에 맞서서 일어선 것은 바로 독일의 마르틴 루터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종교-는 그들 스스로의 높은 가치를 위한 수단의 하나이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신에게 맞선다는 것 자체가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신보다 인간의 내면을 더 중요한 가치로 생각 할 수 있는 독일의 문화, 의식의 바탕이 있었기에 종교 개혁의 신호탄은 독일에서 처음 발사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처럼 독일인들의 특성을 각 개인에 대한 존중이라고 본다면 한국인들의 특성은 집단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집단의 목적과 개인의 목적이 서로 상충 될 때 개인의 목적은 집단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개인의 가치보다는 집단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며 집단과 집단간의 배타적인 관계가 사회구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유로파유로파’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내면적 선택에 대한 존중은 한국 사회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조직 사회에서 조직 내부의 비리를 폭로하는 사람은 오히려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또한 ‘신과 함께 가라’에 나오는 것처럼 종교라는 강력한 가치의 테두리 안에서의 일탈은 그 개인의 사회적 생명의 종말을 가져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글루미 선데이’에서 나오는 일로나, 차보, 안드라쉬와 같은 관계는 상상 할 수도 없고 결코 허용 될 수도 없는 추악한 행위로 비난 받을 수밖에 없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으로 나타나는 사회 구조와 개인을 중심으로 두는 의식과 집단을 중심으로 두는 의식. 이것을 우리는 독일과 한국의 차이라고 말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듯 하다.












※ 참고문헌

1) 변학수, <문화로 읽는 영화의 즐거움>, 경북대학교 출판부, 2003년

2) 이관우, <독일 문화의 이해>, 학문사, 1995년

3) 동아 출판사, <과학 동아>, 동아 출판사, 2004년 5월호 통권221호


Posted by 귀여운호랑이
"오늘 기분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먹어 보니까 맛이 정말 좋은 것 같네요. 보기도 좋은 것 같고요. 그래서 지금 즐거운 것 같아요"

 요즘 TV를 보다 보면 온통 '같아요" 투성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모든 문장의 종결은 '같아요'로 끝내는 게 표준어법이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즐거워도 즐거운게 아니라 '즐거운 거 같고 슬퍼도 슬픈게 아니라 슬픈 거 같다고 한다. 심지어 방금 맛 있는 음식을 먹고도 '정말 맛 있는 것 같다'고 하니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미각을 잃어버린 건가? 자기가 기쁜지, 슬픈지를 추측해야 하고 심지어 맛도 있는 지 없는 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들만 TV에 나오고 있다. TV에서 연예인들이 줄기차게 '같아요, 같아요'하다보니 일반 사람들도 이젠 말할 때 당연히 '같아요, 같아요'로 말을 끝낸다. 모두 자신의 기분이 어떤지를 도저히 알지 못 해서 '혹시 내가 지금 기쁜 건 아닐까' 하고 추측해서 말해야 하는 바보들이 되어버렸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루 정도만 TV를 보고 사람들과 이야기 해보면 수 많은 같아요 종결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이런 '같아요' 홍수는 언제부터, 그리고 왜 시작되었을까? 10년 전쯤의 TV 자료를 구할 능력도 없고 사회심리학을 다룰 만한 능력도 없으니 그저 나름대로 추측해 보면 그 시작은 인터넷이 퍼지고 인터넷 기사에 댓글들이 활발하게 달리면서 부터가 아닐까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부터 신문 기사에 나오는 사람들, 특히 연예인 기사에 달리는 글은 반 정도는 악플이다. 연예인 기사의 경우는 '선리플 후감상'이 아니라 '선악플 후감상'이니 그 기사를 보는 연예인 본인의 마음은 오죽할까. 그러다 보니 그들은 댓글을 무서워 하게 되고 최대한 덜 욕을 먹을 수 있는 말을 찾아야 하고 그런 마음이 결국 자신도 모르게 '같아요'를 통해서 무언가 피할 구석을 만드는 식으로 나온 것 같다. 어떤 말을 확실하게 끝맺으면 기상천외한 이유로 욕을 해댈게 분명하니 '같아요'라고 말을 맺음으로써 '사실 내 생각은 정말 그렇다는게 아니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한 번 생각해 본 거였다. 오해다!'라는 정치인식 어법말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정치인들과 비슷한 어법을 써야 하는 연예인들을 생각하니 참 안스럽기까지 하다.

 우리 사회는 이런 '같아요'의 홍수로 인해 이미 같아요 사회로 변해버렸다. 자신의 감정조차 믿지 못해 추측으로 이야기 해야 하는 사회는 결국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믿지 못 하는 사회가 될 수 밖에 없다. 말 그대로 '믿음 없는 사회'가 되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믿는 사회가 인류 역사에서 언제 있었겠느냐만은 그래도 이런 '같아요'는 그나마 부족한 믿음조차도 지워버리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사람들이 사랑 고백을 할 때도 '내가 만약 어쩌면 혹시라도 너를 사랑하는 지도 모르는 것 같아'라고 하는 날이 올까봐 살짝 겁이 난다.
Posted by 귀여운호랑이